노팅힐의 나폴레옹(The Napoleon of Notting Hill)
노팅힐의 나폴레옹 도입부에서 Auberon Quin이라는 괴짜가 소개될 무렵에는 Basil Grant(The Club of Queer Trades)나 Mr. Pond(Paradoxes of Mr. Pond)처럼 이상한 탐정이 하나 등장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한데 페이지를 더 넘기다 보면 추리소설이 아니라 정치적인 우화임이 드러난다 (물론 체스터튼의 추리소설은 또한 형식만 추리물을 빌린 우화지만). 소설의 배경은 제비뽑기로 다음 왕이 결정되는 이상한 정치형태를 가진 미래의 잉글랜드인데, Quin이 얼마나 이해 불능의 유머감각을 자랑하는 괴짜인지 설명이 끝나자마자 그가 왕으로 뽑히고 만다. Quin은 순전히 “그래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현대의 런던에 중세 봉건제 시기에나 있었을 법 한 행정구역별로 독립된 자치체제를 되살린다: 노팅힐, 켄싱턴, 일링, 베이스워터 같은 동네마다 군주를 임명하고 휘장도 만들어주고 군대도 만들 수 있게 한 것이다. 한데 이 과정에서 농담처럼 던진 한 마디를 듣고 자라난 한 꼬마(Wayne)가 십수년 후 노팅힐의 지배자(?)가 되고, 자기가 성장했던 노팅힐의 조그마한 골목길이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켄싱턴에서부터 노팅힐을 가로질러 건설하려는 도로의 공사에 반대하면서부터 사건이 커진다. 결국 노팅힐은 런던의 다른 borough들과 전쟁(!)을 벌이고…
우화의 메세지는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 인간에게 존재하는 동전의 양면같은 두 가지 원형 - 농담꾼과 정치적 광신도 - 에 대한 스케치.. 정도라고 하면 되겠다. 소설 말미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메세지를 친절히 건네주시는데다가, 결말 이전의 스토리 또한 약간 어거지다 싶은 구석이 있기 때문에 책을 막 내려놓은 다음에는 “이거 뭥미”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한데 시간이 좀 지나고보니 농담꾼과 광신도라는 구분도 썩 나쁘지는 않은 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정치적인 언어를 조직적으로 구사하고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몸을 던질 준비가 돼있는 사람과, 정치적인 언어를 조롱하고 신념을 뒤집어보기 위해 위악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정도로 구분할 수 있으려나.
나는 어느 쪽에 속하나 생각해봤더니 위악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의 위인은 못되지만 정치적인 언어에 대한 가벼운 알러지 때문에 아무래도 후자에 가깝지 않나 싶다. 정치적인 언어는 결국 몸으로 살아내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는 반면에 농담, 취향의 공간에는 애초에 정답이라는 게 없는 거니까 부담이 덜하다고 해야 하나.
메세지를 차치하고,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은 물론 체스터튼의 문장. 그의 문장이 깊은 문학적 완성도를 자랑한다고 말하기는 좀 힘들 것 같고, 요즘 기준으로 보자면 케케묵은 문체이겠지만 아무튼 나에게는 읽히는 맛이 끝내준다. 영국식의 초현실적인 유머감각에도 가산점 - 왕이 된 Quin이 노팅힐에서 벌어진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갑자기 종군기자를 하겠다고 나서서 써보내는 현장 르포에 이르르면 두 가지가 맞물려서 정점을 이룬다 :)
ps. 개인적으로 남달리 웃겼던 부분은, 노팅힐에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준비중인 Wayne이 자기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그 골목길에 위치한 가게 주인들을 하나 둘 씩 설득하는 장면. 중세풍의 비장한 언어를 구사하는 Wayne에게 가게 주인들은 전부 다 “얜 뭐야” 하는 반응을 보이는데 (웨인: “노팅힐에 사는 우리들은 당신 직업의 신비를 뼛속까지 느끼고 있소. 그런데 이제 노팅힐 자체가 위기에 처했단 말이오” 약국주인: “뭐 다른거 필요하신 건 없구요?”), 유독 장난감과 잡화를 파는 가게 주인(“you strange guardian of the past”)만 “지금 노팅힐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그랬소?” 하면서 반색을 한다. 알고보니 이 가게 주인은 요즘 말로 하면 밀리터리 오타쿠, 그러니까 워게이머;;;; Wayne을 가게 뒤로 끌고 들어갔더니 각종 유명한 전투의 재현 및 재미삼아 노팅힐을 방어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고안해 둔 미니어쳐 워게임이… 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