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2012: 선수들을 넋놓고 쳐다봐도 좋은 이유
런던 올림픽: 운동 선수들의 육체를 쳐다봐도 좋은 이유
올림픽 경기를 본 사람이라면, 선수들의 외모가 그야말로 끝내준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이렇게 강하고 아름다운 육체가 공공연히 전시될 경우, 쳐다보는 게 어찌 무례한 일일수 있나?
조이 윌리엄스(Zoe Willams), 가디언 “이것 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 아이인지. 아 죄송합니다. 지금 방송 나가고 있나요?” BBC의 클레어 볼딩에게 말문을 연 수영선수 채드 르 클로스의 아버지는 넋이 나가 있었다. 클레어는 “예, 생방송입니다"라고 유쾌하게 대꾸했다. 아버지가 무슨 욕이라도 했냐면 그것도 아니다. 이 자랑스런 남아공 아버지는 그저 감격에 벅찼던 것 뿐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올림픽 선수인 마이클 펠프스를 200미터 접영에서 이겼다는 사실보다도, 아버지의 눈에는 아들이 스스로도 이해가 거의 불가능할만큼 아름다워 보였던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지난 몇 주 동안 온 몸의 근육 하나, 털 한 가닥 버릴 것이 없는 이 신격화된 선수들을 구경하는 동안 우리는 평소같으면 절대 불가능할 말들을 내뱉고 있다. 그 완벽함에 넋을 잃고, 아름다움에 놀라고, 우리에게도 우람한 가슴 근육과 삼두박근이 있었으면 하고 소망한다. 올림픽 덕분에 가능한 쳐다보기, 사면받은 육체의 대상화다. 수영을 게이 포르노에 비유하고 싶다고? 얼마든지. 선수들을 같이 자고 싶은 순서로 순위를 메기고 싶다고? 물론 괜찮다 (“런던 올림픽의 화끈남들” 포스트 작성자의 솔직담백한 캡션을 보시라: ‘바브리넥 흐라딜렉, 카누 슬라롬, 체코슬로바키아. 어제까지는 카누이스트라는 단어가 있는 줄도 몰랐다’). 모두들 평소보다 유머감각이 급상승해서, 심지어 나같은 페미니스트마저도 리지 아미스테드가 “헬멧을 쓴 꽃의 요정같다"는 말을 불평 없이 그냥 들어넘길 기세다. 비치 발리볼 선수들만 쳐다보는 게 아니라, 참가한 모든 선수들을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 처럼 전부 쳐다보는 바에야, 누가 감히 불평할텐가?
과거의 올림픽 관객들은 선수들을 입벌리고 쳐다보는 것이 올림픽의 목표라는 것을 처음부터 까놓고 밝혔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올림픽이 시작되기 전 선수들이 발가벗고 거리를 행진해야 했다. 이 행진은 발가벗고 진행되는 본 경기를 구경하기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했으리라) 전에 관객들을 위해 행해지는 일종의 워밍업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달리기 선수의 허리감개가 경기 중에 풀어졌더니 더 빨리 달리더라는 사건이 있은 후부터 옷을 벗고 올림픽을 행했다고 한다. 결국 올림픽에서 옷을 입는 것은 일종의 야만주의, 혹은 적어도 완벽하지 못한 육체를 가려야 하는 수치심의 발로로 여겨지게 됐다. 내 생각엔 우리도 그런 상황에 다가가고 있는 것 같다 (수영 경기를 다 보고 났더니 여자 유도 선수들이 옷을 너무 많이 입은 것 같지 않던가? 그렇게 옷을 많이 껴입어야 하다니, 선수들의 기술에 대한 모욕인 것 같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서기 364년부터 2008년까지가 비정상적인 시기였을 수도 있다. 조만간 완벽한 선수들은 올림픽 기간 내내 벗고 지내게 되리라. 브라질 올림픽에서는 고려해봄직 하다. 진도 나가자.
왜 쳐다보는 게 무례한 일이 아닌가? 거의 완벽한 남녀비례 덕분이다. 사람들이 몸매 어쩌구를 논할 때에는 그 대상이 대부분 여자이다. 내 머릿속에 저절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카일리 미노그의 엉덩이인 것을 보니 나도 나이가 들었다 (물론 카일리 미노그의 엉덩이는 전혀 나이가 들지 않는다). 육체에 대한 응시가 어느 한 젠더에만 국한될 경우에는 언제나 수상한 냄새가 난다. 깔보려는 의도, 혹은 현대적으로 보이겠다는 강박. 젠더의 차별없이 만인을 동등하게 쳐다볼 경우에는, 어쩌면 다른 의도란 없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법 하다. 어쩌면 정말 육체 자체가 놀랍기 때문에 쳐다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어떻게 안 볼 수가 있어? 마치 밤하늘을 가르는 혜성을 쳐다보는 게 무례하다고 하는 셈 아냐?
완벽함에 어떤 목표가 있을 경우, 육체 자체가 독립된 의지를 가진다는 느낌이 든다. 일반적인 육체의 대상화에서는 육체가 인격을 가진 사람에게 속한다는 사실이 종종 무시된다 - 몸매 감상용 화보집에서 모델이 종종 먼산을 보거나 바닥만 쳐다보고 있다는 점이 재밌지 않은가? 포르노는 이런 경향를 거의 코메디에 가까우리만큼 극단적으로 몰고간다: 육체의 나머지에 대해 가진 환상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배우들의 머리는 화면 밖으로 잘라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대상, 주제, 신문장수, 지나가는 행인까지 모두의 격이 떨어진다. 한데 여자 운동선수의 허벅지를 논할 때에는 절대 격이 떨어지는 법이 없다. 선수의 육체는 그 선수의 삷과 분리할 수 없다. 100미터어치 허들을 12.54초에 넘는 그 허벅지는 바로 선수의 자부심이자 기쁨인 것이다. 이 선수의 몸매가 완벽하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그 선수의 아이들이 예쁘다고 칭찬하는 것과 같다. 게다가 상대가 자기보다 훨씬 우월한 사람이라면 대상화하든 쳐다보든 집착하든 그 무슨 짓을 하든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은 간단한 산술이다. 트위터에서 어떤 바보가 여자 역도 선수 조이 스미스에 대한 BBC 다큐멘터리를 보고 그녀의 성정체성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했다 (아마 이런 식으로 생각했을테다: “여자가 저렇게 힘이 세다니, 저걸 칭찬하면 아마 나보고 게이라고 하겠지. 그러니까 내가 먼저 저 여자를 게이라고 부르겠다! 그러면 다들 속을거야” 바보짓도 이정도면 웃기지도 않는다. 아마 개들이 저런 수준으로 생각할거다). 조이 스미스는 자기 블로그에 이렇게 답했다: “너네가 개인적으로 우리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던 말든 대체 우리가 무슨 상관일 거라고 생각하니? 우리보고 어쩌라고? 역도 그만 두고, 식단을 고쳐서 남자처럼 울퉁불퉁한 근육을 없애고, 얌전히 시집가서 주부라도 되면 언젠간 예쁘게 봐주겠지, 뭐 이러라고?” 초인은 모욕에도 과찬에도 기분이 상하지 않는다. 나뭇잎이 바람을 기분상하게 하던가?
허벅지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독일 사이클 선수 안드레 그라이펠과 로버트 포스트만의 사진이 지난 주에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나는 사진을 처음에 인터넷 음란사이트의 정점인 Gransnet(할머니 할아버지 네트워크)에서 봤다. 독일 선수들이 서로 근육맨 컨테스트라도 했나본데, 포스트만이 압승을 거뒀다. 이 선수 다리는 에드워디언 그랜드 피아노 다리쯤 되보인다. 해당 사진은 낮에 찍은 것인데, 해떨어지고 나면 무슨 사진을 찍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육체들은 단순히 완벽한 게 아니라, “다른 의미로 완벽"하다. 보통때 같으면 매력의 법칙에 선을 그어 전달하는 것은 냄새를 싫어하는 까다로운 마케팅 전문가들이다. 육체적 완벽함의 메인스트림에서는 어깨가 넓은 여자는 찾아볼 수 없고, 운동 잡지엔 가슴에 왁싱을 한 남자만 가득하다. 허벅지 근육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여자도, 브래들리 위긴스처럼 깡마른 남자도 볼 수 없다.
그러니 올림픽 선수들의 육체에 분명 참신한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올림픽은 동시에 우리 모두의 취향이 다르고, 육체적인 포디즘(Fordism: 무슨 색이든 검정이면 된다, 어떤 여자든 날씬하면 된다, 어떤 남자든 근육질이되 너무 이상하지만 않으면 된다)은 인간의 욕망이 가진 놀라운 다양성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의 전시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