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ld by an idiot

남성의 힐끔거림: 우리는 어떻게 여성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에 실패하는가

남성의 힐끔거림(glance): 우리는 어떻게 여성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에 실패하는가

Lili Loofbourow

2013년 봄 HBO는 소위 “엘리트”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은밀한 실험을 했다. 두 개의 새로운 버디 드라마를 연달아 방송한 것이다. 둘 다 완결된 단일 시즌으로 구상된 것이었다. 둘 다 한 명의 재능있고 유별난 감독이 전체 시즌을 제작했으며, 둘 다 여러 명의 작가로 구성된 작가 팀 대신 통일된 작가적 비전을 추구했다. 둘 다 특정 장르에 속하는 듯 보이면서 여러 다른 장르에 손길을 뻗쳤다. 둘 다 훌륭한 배우들을 복잡한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둘 다 낭만적인 우정의 가치를 재확인하며 끝났다. “True Detective“와 “Doll and Em” 이야기다.

이 두 드라마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하나는 거의 패러디에 가까우리만큼 분석되고 연구되었다. 다른 하나는 - 실제로 훨씬 짜임새있는 예술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 가볍게, 그리고 부정확하게 “풍자적"이라는 딱지가 붙여진 뒤 잊혀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자들 이야기는 과대평가되었고, 여자들 이야기는 과소평가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남자” 대 “여자” 작품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흔히 말하는 남자의 시선(male gaze: 남자가 여자의 몸을 흝어보는 시선을 말함, 역자주)이라는 표현에 대비헤서 남자의 힐끔거림(male glance)라고 부르도록 하자. 우리는 누구나 이런 행동을 하며, 그 결과 좋은 예술을 감별할 능력이 망가지고 있다. 그 영향은 치명적이고 누적되는 것이어서, 우린 결과적으로 많은 인재들을 잃었다. 일면 우리가 도무지 좋은 작품을 알아볼 눈이 없기 때문에, 수십년 동안 훌륭한 작품들이 줄줄 새어 나가고 있었다는 거다.

우리가 얼굴을 쳐다볼 때면 발칙한 충동이 고개를 든다. 광고와, 수세기동안 지속된 남성 우위의 이미지 메이킹의 결과이다. 아마 당신도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여성의 얼굴이라고 알려준 얼굴을 보면, 남성이라고 말했을 경우보다 훨씬 더 깐깐하게 비평을 하게 된다. 여성의 피부는 더 부드러워야 한다. 우리는 주름과 변색, 모공을 찾아내고, 남성이라면 하지 않았을 방식으로 여성의 미에서 이 결점들을 감점 처리한다. 미학적 평가에 젠더가 영향을 준 역사는 유구하다. 이런 나쁜 버릇은 고대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으나,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우리의 순간적 판단은 이론적 진보를 무색하게 만들고 만다.

수잔 손탁이 미학적 패러다임에 대해 남긴 다음과 같은 글은 곰씹어 볼만 하다: “남자가 가지는 가장 큰 이점은 우리의 문화가 남성의 미에 대해 소년과 남자 두 가지 표준을 허용한다는 점이다. 소년의 미는 소녀의 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소년과 소녀의 미는 모두 갸녀린 아름다움이며, 인생의 초기에만 잠시 피어나는 것이다. 다행히, 남자들은 더 무겁고, 거칠고, 두터운 체형으로 대변되는 또 다른 잘생김의 기준 하에 스스로를 받아들일 수 있다. 여자들에게는 이와 동일한 두 번째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을 위한 미의 유일한 기준은 여성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깨끗한 피부를 유지할 것일 요구한다. 주름 하나 하나, 선 하나 하나, 흰 머리 한 가닥 한 가닥이 여성에게는 패배를 뜻한다.”

만약 여성의 얼굴에서 디테일을 발견하는 우리의 능력이 시각적인 버릇에 의해 증폭된다면, 여성의 이야기에서 복잡함을 보는 우리의 능력은 우리의 독해 버릇에 의해 감소된다. 수 세기동안 한 쪽 (역자 주: 남성의 작품)을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는 관행이 반대 쪽 (역자 주: 여성의 작품)은 망원경을 거꾸로 한 채로 들여다보는 관행을 낳은 것이다. 여성의 이야기를 접하면, 우리는 마치 아마추어 천문가가 북극성을 보고 느끼는 분류의 충동을 느낀다: 그는 “저기 북극성이다!“라고 외친 뒤, 다음 별을 찾을 것이다. 본 것을 정리하고 확인한다는 점에서 편안한 행위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이런 행태는 게으른 독해 - 사실 독해(reading)도 아니다, 게으른 보기(looking) -가 충분하고, 완전하고, 옳다는 환상을 낳는다.

남자의 힐끔거림이 바로 여성에 대한 코메디가 “칙 플릭(chick flick)“이 되고 마는 이유이다. 또한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진지한 영화에 대한 모든 논의가 “강한 여성 캐릭터"라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우리에 갇히고 마는 이유이다. 또한 솝오페라(soap opear)와 리얼리티 티비가 쓰레기(trash)와 동의어가 되는 이유이다. 남자의 힐끔거림은 우리가 엄마들을 본질적으로 심심한 존재로 여기게 하고, 여성 사이의 우정은 통상적인 질투 아니면 그보다 더 재미없는 들큰한 사랑 둘 중 하나라고 여기게 한다. 만약 여기에 세 번째 옵션이 있다면, 적이었다 친구가 되는 시나리오인데(frenemy-cum-friend), 이것 역시 얄팍하기는 매한가지이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볼까? 대체 누가 보고 싶을까?

분류에서 퇴짜놓기로 이어지는 내리막은 놀랍도록 부드러우며, 결국에는 무관심으로 끝이 난다. 남성의 힐끔거림이 가지는 위험은, 바로 그게 합리적이라는 점이다. 이런 편견은 항상, 혹은 필연적으로 틀린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위험하다. 왜냐면 단지 작품을 보기만 하고 그것을 독해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힐끔거림은 여성이 중심이 된 이야기에서 싸구려 감성, 혹은 그 반대로 보상 심리로 오버하는 “여성의 힘” 프로파간다, 두 가지 이외의 메세지를 좀처럼 읽지 못한다. 결국 이 편견은 강한 여성 주연이란 개념은 이야기가 아니라 광고판이라고, 사실 꽤 적절하게, 결론내리고 만다.

남자의 힐끔거림(glance)은 남자의 시선(gaze)과 정반대이다. 가장 침범하고 싶은 곳에 사랑스레 오래 머무르는 대신, 힐끔거림은 쳐다보고, 넘겨짚고, 넘어가버린다. 무엇보다도 힐끔거림은 빠르다. 이 편견의 영향을 받는 우리들은, 우리가 얼마나 빠르게 분석을 마쳤는지에 기뻐하기 일쑤이다. 힐끔거림은 별 노력없이 뭔가를 알고 싶은 우리의 미숙한, 거의 에로틱한 허기를 달래준다. 우리 직관이 너무나 명백하게 옳기 때문에, 별다른 분석적 노력을 할 필요도 없이 퇴짜를 놓는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탐험가가 아닌 아마추어 천문가를 발견한다. 연구하거나 발견하는 대신, 우리는 손가락질하고 분류한다.

우리의 본래 의도가 얼마나 고상하건 간에, 여성의 경험을 자세히 들여다볼 줄 모르는 습관은 수 세대에 걸쳐 학습되었고, 그 결과 우리는 여성의 텍스트가 보편적인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여성의 텍스트는 작고 섬세하거나, 시시하고 가정적이거나, 허영에 차 있거나, 요염하거나, 고백적이다. 여성의 텍스트는 감상적이거나 멜로드라마틱할 수는 있고, TransparentGirls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도발적이거나 노골적이거나 노출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여성의 텍스트가 실험적이기를 기대하지는 않으며, 위대하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남성의 경우와 달리, 여성적인 추(ugliness)로부터 초월적인 예술을 읽어내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 2013년 이후에 InsecureFleabag같은 프로 덕분에 우리가 얼마나 진보했던 간에, 우리는 여성 스토리텔러들을 거장으로, 작가적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사실 그래야 할 필요가 없다! (뭐든 훌륭함의 기준을 하나 꼽아보는 건데) 이른바 위대한 미국 소설은, 역사적으로, 여성들의 장르가 아니다. John Cheever가 인상적으로 말했듯이 “미국 작가의 임무는 창문 너머로 비를 쳐다보는 불륜에 사로잡힌 여성의 불안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400명이 조명 아래 동시에 파울볼을 잡으려 달려드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의식이다.” 여자들도 썩 훌륭하다: 여자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따로 있기는 하지만, 보편성은 없다. 여성은 대중이 아니다.

여자 이야기를 볼때면, 우리는 모두 조금 바보가 된다. 우리는 일반적인 기대치 너머를 보기에 실패한다. 이것이 2012년 디즈니가 Brave를 발표했을 때, 보통은 꽤 통찰력이 있는 일부 평론가들이 “또 공주 영화를 만들었다"라고 불평한 이유이다. 그리고 이것이 Doll and Em이, 헐리우드에서 여성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에 대한 지금껏 본 적 없이 훌륭한 커멘트이자, 대부, All About Eve, Sunset Boulevard에 필적할만한 작품이, 그저 풍자 취급을 받은 이유이다.

심지어 작품에 감동을 받은 경우에도, 우리는 여성의 텍스트가 우리에게 가진 영향력이 작거나, 완벽하게 컨트롤되지 않았거나, 최악의 경우 우연이라고 넘겨짚기 일쑤이다. 텍스트가 “그 스스로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itself)” 작동한다고 말이다. 이 현상 또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마크 트웨인은 등장 인물들을 좋아할 수가 없다는 이유로 제인 오스틴을 비판했다: “제인 오스틴이 글을 너무 무자비하게 잘 쓰는 건가? 적어도 내가 보기에?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오스틴은 내가 등장 인물 모두를, 일말의 후회 없이 미워하게 만든다. 이게 그녀의 의도일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중간까지는 등장인물을 미워하게 만들었다가 후반부에 가서야 좋아하게 할 생각이었을까? 그랬을 수도 있다. 만약 그랬다면 훌륭한 예술일테다.”

트웨인이 암시하는 바는, 물론, 오스틴은 그런 훌륭한 예술을 만들 능력이 없으리라는 것이다. 어떤 여자도 일부러 그런 실험을 할 리가 없다. 아냐, 오스틴이 트웨인에게 불러 일으킨 감정은 우연과 트웨인 본인의 놀라운 인지 능력의 조합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 없다. 트웨인이 특정 등장 인물을 엄청 미워하는 이유는, 작가로서 오스틴의 조절 능력 때문이 아니라, 트웨인 본인의 특출남과 훌륭한 사회적, 문학적 취향 때문이다.

통찰인 척 위장된 이따위 지루한 독해가 초기 미국 풍자작가들에게만 국한된 것이라면 좋겠지만, 물론 그렇지 않다. 레나 던햄의 Girls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일부러 불쾌하게 그려졌다는 것을 비평가들이 알아차리는 데 얼마나 오래 걸렸던가? 인터넷에는 네 명의 등장인물 모두 참을 수가 없다는 빈정대는 비평이 마치 대단한 통찰인냥, 마치 던햄 본인이 감추려 한 비밀 혹은 심지어 깨닫지도 못한 사실인냥 넘쳐났다.

이게 우리가 대부분의 여성 작가를 다루는 방식이다. 맨 부커 상을 받은 Eleanor Catton은 “지켜보니 남성 작가들에게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묻고, 여성 작가들에게는 무슨 느낌을 받는지를 묻는다"고 말한다. “내 경험상, 그리고 또 많은 여성 작가들의 경험상, 인터뷰에서 나오는 질문은 우리가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에 대한 것이다. 행운, 정체성, 그리고 어떻게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가 우리에게 번뜩였는지.”

또 나왔다: 운, 우연, 그리고 여성의 예술행위에 대한 수동적 가설: “당신은 어떻게 창조했습니까?“가 아니라 “당신은 어떻게 아이디어에 얻어 걸렸습니까?”. Catton이 잘 설명한 바에 따르면 “인터뷰는 여성 작가를 좀처럼 진지한 사상가, 철학가, 평생 지속될 무언가에 몰두하는 사람으로 보지를 않는다.”

얼굴과 이야기는 서로 다른 전문 분야에 속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어려서부터 생산자의 젠더에 따라 다르게 소비하는 법을 배운다는 점이다. 여성의 얼굴에서 결점을 찾으려는 행위는 종종, 그리고 대체로 무의식적으로, 권력의 행사이다. 이 행위는 관찰자가 스스로의 통찰력에 감탄하게 만든다. 관찰자는 화장과 조명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속이려는 여성의 의도를 간파하고 거기에 넘어가지 않았다고 확신하며 돌아선다. 이 빈정대는 시선은, 조나단 스위프트가 1732년에 발표한 시 “Lady’s Dressing Room“에서부터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계속되어 왔으며, 또한 이것이 우리가 보톡스를 맞은 Real Housewives 등장인물들이 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시선이다.

이 관행의 위험은 내재적인 여성혐오 자체가 아니다: 여성혐오라면 우리 모두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아니, 진짜 위험은 우리가 실제로는 끔찍하게, 재난에 가까울만큼 근시안인데도 불구하고 멀쩡히 잘 볼 줄 안다고 생각한다는 데에 있다.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의 인지 능력의 정확도를 과대평가한다는 사실 뿐이 아니다: 우리는 은폐물을 내용으로 오해한다. 우리가 평소 아무리 리얼리티 티비는 사실 각본이 짜여 있고, 광고의 이미지는 화장과 조명과 포토샵의 결과일 뿐이라고 제아무리 불평을 늘어놓은들, 직접 눈 앞에 보이는 증거를 무시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여러 연구 결과가 밝힌 바 있다. 우리는 우리가 꿰뚫어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효과 그 자체에게 속아 넘어간다. 우리가 여성의 파운데이션을 꿰뚫어보고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사실 우리는 여성을 얼굴로 평가하는 것보다 수백배 나쁜 짓을 하고 있다: 바로 화장했네, 라고 알아차리는 것이 화장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제대로 인지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착각하는 실수이다.

인류의 기억이 닿는 한, 바로 이것이 화장의 목표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결점을 감추고, 관찰자들로 하여금 화장의 결과가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관찰력이 좋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 전통적으로 여성의 예술적 생산물을 배출하는 주된 창구인 아름다움(beauty)은 보는 사람에 달린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속담(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린 것, 이라는 경구)에는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다: 속담은 미를 생산한 사람이 아니라 미를 관찰하는 사람을 칭찬한다(이 관계는 특수한 맥락에서만 뒤집어진다: 예를 들어 성폭력에 대한 대화에서. “그 여자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데?“라는 발언은, 관찰자에 대해 여성이 가지는 수동적인 힘이 필요 이상으로 과장되는 몇 안되는 맥락이다).

이것은 일종의 여성 기사도이다. 이 기사도의 본질은, 우리 보라고 뻔히 내다 놓은 것을 마치 자연스럽게 눈치챈 듯 여기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모든 기사도가 그러하듯이, 이 기사도 또한 인정받지 못하거나 눈치채지 못할 경우 해로운 결과를 낳는다.

이 범주적 실수 - 마스크를 눈치채는 행위를, 그 아래를 꿰뚫어 보는 것과 동일시하는 실수 - 의 결과는 우리가 (물론 무의식적으로) 모든 여성은 마스크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훌륭한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 마스크는 결점을 가리기 위해 쓴다. 그러니 가면을 꿰뚫어 보면 뭐가 보인가? 결점. 증명 완료. 하지만 우리가 마스크를 꿰뚫고 진짜로 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빈 칸이다. 두뇌는 진공을 싫어하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제한된 데이터를 이용해 조금 질이 떨어지는 가짜 얼굴을 만들어 내서 이 공간을 채운다. 우리의 형편없는, 미리 프로그램된 상상 속의 여성은, 밖에서 보이는 표면보다 살짝 더 못생긴 얼굴이며, 우리가 여성들에게 허용하는 유일한 의도성은 가면을 썼다는 것 뿐이다.

만약 전통적인 남성 기사도가 허세에 찬 문 열어주기처럼 요란한 전시 행위라면, 여성 기사도의 핵심은 눈에 보이질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실제보다 더 표면과 내면을 잘 읽어낸다고 미학적으로, 또 철학적으로 다독여졌음을 인지하지를 못한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가 너무 잘난 줄 아는 모든 존재가 그렇듯이, 우리 또한 결국 천박한 사고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스스로의 완벽한 시각을 찬사하느라 이렇게 바쁘지 않았다면, 우리가 눈치챈 가변 아래에 흥미로운, 그리고 의도를 가진 주관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주관성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점 들 이외에, 태어난 순간부터 스스로의 행위를 끊임없이 제삼자의 관점에서 검토하도록 훈련받아왔다. 다르게 말하자면 여성들은, 우리가 눈치채고 벛겨버리려는 외면의 얼굴 이외에도, 통상적인 양의 자의식에 추가로 몇 겹의 메타 레이어를 지니고 걸어다니고 있다. 여성이라면 누구든 James Franco 천 명을 데려와도 비교가 안 될 행위예술을 간직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시점에서, 독자 중 누군가는 내가 여성 중심의 이야기를 지적으로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많은 관찰자들과 독자들을 무례하리만큼 무시하고 있다고 반박할 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하자면, 도대체 니가 말하는 “우리"가 누군데? 나는 그 “우리"에 속하지 않는다구!

내가 말하는 “우리"란, 미디어를 소비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젠더, 클래스, 인종에 관계 없이 스스로와 동일시할 것을 훈련받는 말 그대로 우리 모두 안의 “우리"이다. 이 “우리"는 개개인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좋겠다. 사실, 이 “우리"는 종종 소비자가 스스로를 “우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이 “우리"는 이것 없이는 개인이 스스로의 문화를 이해하거나 검토할 수 없는, 매우 실재적인 존재이다. 이 “우리"는 사회학자이자 시민 운동가였던 W. E. B. Du Bois가 “이중 의식"이라고 불렀던 것의 한 버전이다:"(이중 의식은) 매우 특별한 감정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 우리의 영혼을 유쾌한 경멸과 동정을 담아 우리를 보는 세상의 잣대로 재고 있다는 느낌”.

영화 이론가 Laura Mulvey는 남성의 시선을 분석하며 여성이 “우리"를 어떻게 경험하는지를 잘 서술하였다: “여성 관찰자가 자신에게 제공된 향락이, 그 남성화가 너무나 불편해서, 환상이 깨져버리는 것도 언제나 가능하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여성은 비밀리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영웅과 동일시함으로써 얻어지는 자유와 액션과 이야기 속 세상에 대한 지배를 즐길 수도 있다.”

작가 Elizabeth Gilbert는 잡지 Believer와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경험을 다음과 같이 털어놓는다: “나는 경력의 첫 10여년 동안을 오직 남자들에 대해 쓰면서 보냈어요. 남자들에 대해 썼고, 남자들을 위해서 썼습니다. 내가 소설이건 저널리즘이건 간에 여자들에 대해 썼다면, 남자들의 세계를 침범한 침입자로서의 여자들이었어요. 돌이켜보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기간동안에는 내가 남자들에 둘러싸이고 싶은 건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남자가 되고 싶었는지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들은 (목장이건, 바건, 배 위에서건, 여행 중에서건) 내가 일군의 남자들과 있을 때, 그 남자들이 잠깐이나마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던 순간들입니다. 그 찰나 동안 남자들의 진짜 얼굴, 진짜 자아를 볼 수가 있었어요. 나한테는 그게 언제나 아름답고 마술같아 보였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그 “우리”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험이 얼마나 황홀한 것인지 알 것이다. Gilbert의 고백이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Eat, Pray, Love"처럼 “여자 책"을 쓰기 전 시절, 그녀가 “Stern Men"이나 “The Last Americal Man"같은 책을 쓰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Gilbert의 이력은 마치 HBO가 True Detective와 Doll and Em을 가지고 한 실험과 비슷하다. 사실 그보다 더 심한 경험이었던 것이, 한 때 “미국의 경계, 산사나이들의 전설, 그리고 현대 미국이 어떻게 자연으로부터 근본적으로 타자화되었는지를 활기차고 신중하게 담아 내던 일류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가 바로 “여자 소설(chick lit)“이나 쓴다고 놀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Gilbert는 “우리"가 작동하는 방식의 좋은 예이다. 적어도 내 개인의 독서에 있어서는 “우리"가 이겼다. “Eat, Pray, Love"가 받은 전방위 혹평은 웃겼고, 활기넘쳤고, 대박 효과가 있었다. 서평! 패러디! 나는 (Jennifer Egan의 매우 긍정적인 서평에도 불구하고) 안티-하이프에 넘어갔고, 그 결과 이 책을 읽지 않았다. 아직도 안 읽었다. 왜냐면,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일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으로서, 그리고 “우리"의 일환으로서 이 책을 동시에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내면화하는 것이 끔찍한 이유는, 만약 “우리"와 의견이 다를 경우 대판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내가 “Eat, Pray, Love"를 좋아한다면 어떻게 될까? 내 스스로의 취향을 변호하기 위해, 그 감식안을 완전히 무시하기는 너무 무서운 “우리"랑 한 판 붙어야 할까? 다른 사람들은 쉽게 꿰뚫어 본 뭔가에 걸려들어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생각하며 부끄러울까? 지금 하는 말은 “Eat, Pray, Love"를 변호하려 함이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그 책을 안 읽었다. 하지만 내 이야기는 여전히 유용한 예제이다. 왜냐면 분위기 문화(ambient culture)는 바로 이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조롱 혹은 칭찬의 흐름이 위대함이라는 상을 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한다.

“우리"는 내가 묘사하려고 하는 독자로서의 경험이 가지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내러티브를 두 개의 서로 다른 시점, 가끔씩은 세 개로 읽어야 하는 그 진빠지는 경험 말이다. 당신이 백인 시스 남성성으로부터 멀리 도망가면 갈 수록, 점점 더 많은 논점을 저글링해야 한다. 방 안에 있는 사람 중 첫 사람은 자기 이름만, 다음 사람은 앞 사람들 이름 전부 다 + 자기 이름, 이런 식으로 이름 말하는 소개 게임 해 본 사람? 제일 마지막 사람은 방 안에 있는 사람들 이름을 전부 말해야 자기 이름을 말할 수 있다. 이게 소외된 독자가 겪어야 하는 인지적 고뇌에 대한 가장 좋은 비유이다.

물론 그냥 도망칠 수도 있다. “우리"따위 잊어버리고, 편안하게, 스스로의 감상을 즐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사상가, 학자, 창조자, 비평가로 진지하게 대접받기는 틀리게 된다. 많은 이들에게 이 정도는 기꺼이 낼 수 있는 비용이었다.

하지만 도망치기 싫은 사람들에게는, 어느 것도 쉬운 일이 없다. 이 에세이를 미에 대한 신화에 의해 형성된 시각적인 습관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작했으니, 객관성에 대한 신화가 우리의 시각적 경험을 어떻게 지배하는지로 끝맺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결론은 간단하다: 우리가 여성들의 이야기에서 복잡함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복잡함이 거기 있다는 것을 상상하는 경험조차 해 본 적이 너무 없기 때문이다.

최근 인지과학이 발견한, 상대적으로 직관적이지 않은 현상 중 하나는 상상력이 작동하지 않으면 시각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의 시각계는 객관적이지 않다. 이 현상을 설명하는 글에서, 저널리스트 Alexis Madrigal은 뭘 기대해야할지 알려주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지를 보여주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고 말한다.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이미지는 거북한 빈 칸이다. 어떻게 접근해야 할 지, 뭐라고 생각해야 할 지, 가끔은 도대체 그게 뭔지 조차 알 수가 없다. 이것은 매우 불편한 느낌이다. 이 불편함을 해소하려면 가능성을 희생해야 한다. 일단 이미지를 특정한 형태로 독해하도록 독려받고 나면 - Madrical이 사용한 예제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의 로고facepalm으로 보는 것이었다 - 해당 이미지를 다른 물체로 보기, 다시 말해 새로운 눈으로 이미 본 것을 “안 보기"는 정말 어렵다.

2010년 바이럴 히트를 친 비디오에서 Christopher Chabris와 Daniel Simons는 선택적 주의력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잘 보여주었다. 비디오에는 6명의 사람이 등장하는데 3명은 검은 옷을, 3명은 흰 옷을 입었다. 사람들이 두 개의 농구공을 들고 있다. 동영상을 보면서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공을 몇 번 패스하는지 세어보라고 하면, 거의 절반 정도의 시청자들은 가슴을 두드리며 사람들 사이를 춤추며 걸어가는 고릴라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이 현상을 보면 우리가 받는 문화적인 지시사항에 비용이 따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남성 중심 플롯이 흰 옷을 입은 선수들이라면, 그리고 패스되는 공이 관심을 가질 가치가 있는 유일한 플롯이라면, 우리가 패스 횟수를 세는 동안 고릴라를 몇 마리나 놓쳤을까?

포장이 제공하는 힌트에 저항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일단 내가 보는 것이 뭔지에 대한 기대치를 내면화하고 나면, 여성 중심의 이야기를 볼 때 “여자 영화(chick flick)” 이상을 읽어내기란 어렵다. 정보의 바다에 빠진 우리들에게, 단순한 범주화는 거기에 들어맞지 않는 작품들을 걸러냄으로써 우리의 시각을 왜곡하지만, 이 왜곡은 편안한 선명함을 동반한다. 이것이 우리가 리뷰나 시놉시스를 읽는 이유이다. 우리가 방금 본 것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기 위해서, 아직 미성숙하고 뭐라 이름붙일 수 없는 경험을 간략화해서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 경험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지시가 없으면 우리는 허우적대고 만다.

우리는 이보다 더 잘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의 시각을 오랫동안, 충실히 보좌해왔던 지시등을 버려야 한다. 물론 불편할 것이다. 이 과정은 그간 남성의 힐끔거림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인정하고, 우리가 여성에게 적용하는 미적 분석이 얼마나 표면에만 집중해 깊이를 숨기고 마는지를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별 생각 없는 (그리고 예술적으로 파탄에 가까운) 퇴짜놓기를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은 더 어렵다. 비-남성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볼만한 뭔가가 거기에 있다고 가정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반사적인 판단과 분류에의 충동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라는 소리없는 기계장치가 주어진 텍스트를 클리셰라고, 설교적이라고, 지저분하다고, 감상적이라고, 싸가지없다고, 개발이 덜 됐다고 색칠해버리기 전에 일단 뭔가 의도적인 작품이 거기에 있다고 인정부터 하자: 특히 기존에 “여성적인 행위”이니까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를 기만하던 신호가 보이는 경우에는 더욱 더. 물론 볼 게 없을 수도 있다. 다른 모든 에술과 마찬가지로, 여성 중심인 작품 중 일부는 지루하고 별 볼일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남성의 힐끔거림을 버린다는 것은, 그 동안 우리가 비-남성의 예술적 의도라는 게 있을 리 없다고 퇴짜를 놓는 동시에 남성 천재가 있을 가능성에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남성 시스 스트레이트 텍스트를 정확히 그런 이름으로 명시적으로 분류하지 않는 관행 덕분에, 이 텍스트들은 힐끔거림으로부터 자유롭다). 우리가 범한 난체하는 무관심의 역사를 수정하기 위한 출발점은 바로 여성의 텍스트에 우리가 처음 생각한 것 보다 뭔가가 더 있을지 모른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수세기 동안 계속되어 온, 퇴짜의 어깻짓을 합리적으로 수정한다고 해보자. 고릴라를 찾자는 말이다. 이미 남성의 예술에 대해 자동으로 하는 일을 여성에게도 하자: 뭔가 가치있고 재미있는 게 숨어있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해보자는 말이다. 만약 그런 것을 찾으면, 감상해라. 그리고 남들도 알 수 있게 주변에 알려라. 일단 한 번 발견하고 나면, 다시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전에 - 지시사항이 없이는 - 보지 못했던 것을 너무나 명백하고 필연적으로 볼 수 있게 되면,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다.

우리가 애처롭게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하지만 사실은 모르는) 것이 엄청나게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