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ld by an idiot

Pew Research가 2020년의 인터넷에 대해 묻는다

Pew Research의 미래의 인터넷에 관련된 설문조사 질문 항목에 대해 O’Reilly Radar에 Andy Oram(@praxagora)이 답변한 내용을 옮겨봤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클라우드와 풀뿌리 기술혁신에 대한 내용, 그리고 읽기와 쓰기 능력에 대한 내용이 흥미로웠습니다. 참, SNS를 두고 기술은 발전했지만 사회적 규범이 못따라가고 있다고 지적한 부분도 동감 :)

Pew Research가 2020년의 인터넷에 대해 묻는다 구글이 우리를 바보로 만들가? 우리는 클라우드에 살게 될까 아니면 데스크탑일까?

앤디 오람

세상만사 궁금하지 않은 게 없어보이는 Pew Research는 몇 년마다 기술과 사회 제분야의 선별된 관찰자들에게 어이없으리만큼 답이 안보이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서 “인터넷의 미래"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다. Pew는 놀라 딸꾹질이 날만큼 날카로운 질문을 함으로써 참여하는 것 자체를 재미있는 경험으로 만들곤 한다. 질문을 받은 사람은 처음에 “내가 진짜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까?“하고 시작하지만 “애초에 질문이 이렇게 어이없으니 아무 대답이나 마음놓고 해도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Pew의 조사에 참여한 바 있고, 이번 주에 또 한 번 참가했다. 조사에 참여하도록 부탁받은 사람들의 예/아니오 대답은 Per Research의 보고서에 정리되겠지만, 이번 기회에 내가 생각하는 이슈들을 한 번 정리해보고자 한다.

구글이 우리를 바보로 만들까?

첫 번째 질문은 기술적인 것도, 정책에 대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사람들이 인터넷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것도 아니다. 질문의 요지는 인간의 지능과 질문의 방법(method of inquiry)에 닥친 위기에 대한 것이다. 보통 기술이 우리의 학습 능력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질문은 우리의 가치 체계, 그리고 우리가 기술을 어떻게 선택하는가에 대한 것이지 기술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도 그런 관점에서 답해보고자 한다. 나는 기술이 가치중립적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은 사람들의 욕구와 더불어서 창조되고 채택되고 또 발전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니콜라스 카(Nicholas Carr)가 아틀란틱(Atlantic) 지에 쓴 글에서 제기한 질문을 존중하는 바이며 - 비록 그가 타자기의 등장마저도 글쓰기에 위협이 된다고 하는 데 이르러서는 진지하게 동의하기가 힘들긴 하지만 - 따라서 그의 걱정을 좀 덜어주고자 한다. 이 첫 번째 질문은 오로지 사람들의 선택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가 자기성찰(introspection)을 통찰력을 얻는 방법으로써 가치있게 여기고 여러 사안에 대한 오랜 경험이 좋은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요소라고 믿고, 또한 (짧게 이야기해서) 검색엔진으로부터 얻을 수 없는 지식을 여전히 원한다면, 인류는 스스로의 사고의 깊이를 유지할 것이고 구글은 단지 그것을 돕기만 하게 될 것이다.

물론 지금도 즉각적인 분석(instant analysis)과 반사적인 반응(knee-jerk responses) 때문에 많은 양의 글쓰기와 토론의 질이 저하되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검색엔진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냥 주변사람들 취재하고 때우려는 욕구는 탐사저널리즘을 위한 투자가 말라가는 것과 겹쳐서 진짜 중요한 일들에 대해 우리가 받아보는 보고서의 가치를 떨어트리고 있다. 이것 또한 구글 탓은 아니다(구글이 신문과 잡지에서 광고수익을 뺏어가서 그렇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여기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어느 쪽이건 간에 이런 사회적/경제적 동향은 우리가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고, 검색 자체는 이와 별 관계가 없다.

검색엔진의 역할은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정보를 가지고 딜레탕트가 될 수도 있고(카가 걱정하는 것이 이것이다) 혹은 좀 더 믿음직한 경로를 통해 얻은 정보에 의지함에있어 긴가민가했던 지식을 다시 한 번 굳히고 사실관계를 확인해서 핵심적인 분석에 도움이 되게 사용할 수도 있다. 구글은 우리가 연구활동을 위해 필요했던 마지막 10%의 자료를 찾는 데에 들었던 시간을 줄여준다. 나는 카의 글을 아틀란틱 지에 처음 실렸을 당시에 읽었지만, 지금 이 답변을 쓰기 위해서는 웹 검색을 이용해서 온라인에서 찾아서 다시 읽었다. 구글은 내 친구다.

우리는 클라우드에서 살게 될까? 아니면 데스크탑?

분명 우리의 컴퓨터 사용환경은 점차 더 (책상 위보다는 손바닥 위에 놓인) 작은 기기들이 클라우드에 위치한 대용량 데이터와 어플리케이션과 통신을 하는 환경으로 옮겨갈 것이다. 우리의 컴퓨팅을 아주 작은 것과 아주 큰 것으로 분리하는 이 이중적인 트렌드가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이미 많은 분석을 끝내 놓았다: 사생활 침해, 선발주자들의 데이터 축적으로 인한 경쟁 증발, 그로 인한 혁신의 증발, 데이터의 질에 대한 의문, 서비스가 언제나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걱정(오늘 아침에도 트위터에 고래가 뜬 것을 보았다), 그 밖에도 많이 있다.

내가 가진 걱정은 이것이다. 넷북, 타블렛, 그리고 휴대전화가 시장을 너무 잠식한 나머지 성능 좋은 데스크탑은 기관이나 전문가들만 살 수 있을만큼 비싸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이 경우 대중에 의한 혁신은 좌절되기 쉬울 것이고 우리는 그저 소프트웨어 소비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최근의 혁신은 일반 사용자가 고성능의 컴퓨터와 다량의 소프트웨어를 보유하고 큰 모니터와 고급 키보드를 통해 이를 사용할 수 있었던 점에 힘입은 바 크다. 이런 넉넉한 시스템 자원이 사라지면, 그와 동시에 풀뿌리 혁신(grassroots innovation)도 사라질 지 모를 일이다.

나는 어플리케이션 프로바이더들이 풀뿌리 혁신의 가치 - 에릭 폰 히펠의 연구결과를 본받아 - 를 인정해주기를, 그리고 사용자들로부터 시작된 변화를 받아들여주기를 원한다. 코드를 오픈 소스로 만드는 것 뿐만 아니라, 서비스 방문자들이 다량의 소프트웨어를 다운로드받지 않고도 코드를 해킹해볼 수 있는 테스트 환경을 만들어서 공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누구든 편안한 키보드 한 개만 있으면 개발팀의 일원이 될 수 있다. “플러그인을 자체 개발하기 위해서는 여기를 누르세요"하는 링크가 달린 서비스야말로 미래의 성공이 보장된 소프트웨어 서비스일 것이다.

우리의 대인관계(social relations)는 더 좋아질까?

구글에 대한 질문과 마찬가지로 이 질문 역시 기술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선택에 대한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친구/가족과 멀어질 것을 걱정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수백만년에 걸친 진화의 결과로 우리 안에 새겨진 인간적인 욕구를 계속 간직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나는 이메일에서 소셜네트워킹에 이르는 기술들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보다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과 협업을 할 수 있게 해주리라고 기대한다.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사회적인 규범(norm)이 기술발전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소셜네트워킹 사이트에서 아는 사람의 “친구 요청(friend request)“를 거절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심지어 친구관계를 해제하는 것(“unfriend”)은 더욱 더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이런 일이 “괜찮은 일"이라는 사실을 학습할 필요가 있다. 덧붙여서 우리는 우리의 지인들(contacts)를 실제 생활에서 “직장”, “교회” 등으로 구분짓듯이 온라인에서도 구분지을 수 있어야 한다. 좀 더 진보한 소셜네트워킹 서비스들은 우리의 실제 인간관계를 좀 더 정확하게 반영하는 방향으로 이내 진화해나가겠지만, 그보다도 기술이 우리의 인간관계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사람이 앞장서서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읽기와 쓰기능력은 향상될까?

글쓰기라는 개념은 시대와 함께 변화해왔다. 중세는 정말 엉터리로 쓰여진 문서를 몽땅 남겼다.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소수의 사람들은 라틴어 (혹은 그들이 읽고 쓸 줄 알았던 다른 언어)를 상당히 미니멀한 방법으로 배웠고 학자들이 대중에게 수사법의 기본 규칙을 가르치는 데에는 엄청난 시간이 소비되었다. 만약 셰익스피어가 자기 소개서와 이력서를 오늘날의 회사에 제출한다면, 인사과 직원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리라: 셰익스피어는 표준화 이전의 시대에 살았으며, 따라서 법칙보다는 자기 귀를 더 믿었던 작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규범"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이전에는 읽기와 쓰기가 향상될지에 대해 논할 수 없다. 일단 형식적인 문제부터 처리한 다음에, 앞으로도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인지(그리고 우리가 읽게 될 글들을 즐길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더 중요한 질문에 답해보고자 한다ㅏ.

많은 문화권에서 쓰기와 말하기의 분화는 이미 상당수준 진행되어서 거의 서로 별개의 언어라고 해도 좋을 정도가 됐다. 그리고 자메이카에서 쓰는 영어는 미국에서 쓰는 영어와 또 매우 다르다 - 자메이카 사람들은 분명 우리와 의사소통할 때 미국식으로 영어를 말하고 쓰려고 애쓰겠지만.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은 규범(norm)을 인지하기는 하지만 실제 사용(usage)은 맥락(context)에 의존한다.

오늘날, 점차적으로 쓰기라는 행위의 맥락은 계속적인 상호작용 가운데 일어나는 매우 짧은 발화형태(a very short form utterance)를 띄고 있다[역자주:트위터네요;;;]. 내가 우려하는 바는 사람들이 모호하지 않은 용어와 명확한 논리 전개를 통해 논지를 전개하는 능력을 읽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독자와 즉각적으로 만날 수 있는 환경에 있기 때문에, 모호함이 말소되고 논리가 분명해질 때 까지 스스로의 논지를 재술(restate)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독자들로부터 학습하게 될 것이다. 우아하고 설득력있는 “첫” 문장을 쓰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앞으로 쓰게 될 수 많은 문장 중 단지 첫 번째일 뿐이니까.

우리 세대가 지식을 발전시키고 공유하는 데에 있어 대화(dialog)가 주된 수단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인정하다. 입센의 헤다 가블러(Hedda Gabler)의 중심 주제, 그러니까 뢰브보르그(Ejlert Løvborg)같이 홀로 선 철학자가 세상을 뒤집을만한 걸작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은 이미 구닥다리가 됐다. 보다 현대적인 뢰브보르그라면 자기의 생각들을 블로그에 적을 것이고, 다른 독자들이 사려깊은 댓글을 달 것이다. 만약 이런 글쓰기가 뢰브보르그의 독창성을 훼손하고 그가 더 깊은 통찰력을 얻는 데에 방해가 된다면, 그거야 다른 평범한 사람들의 압력에 굴복하고 만 뢰브보르그 본인의 잘못일테다.

고독한 천재라는 낭만적인 개념이 사라져가고 있다면, 과연 현대의 정보교환은 어떤 모델로 상징될까? 플라토의 공회당(Symposium)을 보라. 사상가들은 서로 서로를 상대해야 했다(그리고 그러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소크라테스는 독서를 폄하했는데, 그것은 독자가 작가에게 질문을 던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대화가 더 생산적이고 진리에 더 가까운 방법이었던 것이다.

고대 유대 학자들 또한 독서보다는 토론을 선호했다. 유대 학자들에게도 전수된 텍스트라는 것이 분명 존재했으나, 그들의 가르침 중 절대 다수는 대화에 의해 전수됐으며, 유실을 막기 위해 기록을 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전까지는 글로 적히지 않았다.

격식있는 글쓰기에 관한 한, 정규적인 규칙을 폭넓게 알아야만 사용할 수 있는 미묘한 어투나 말장난은 앞으로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예를 들자면, 오늘날 디킨스가 언어를 구사한 방법 모두의 진가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디킨스가 그의 소설을 출간했던 때에 비교하면 미래에 그런 사람들의 수는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한 시대의 미학에 너무 집착하지는 않도록 하자. 디킨스는 본인의 시대에 인기있었던 문체에 의지했었다. 그 다음 시대의 작가들 - 토니 모리슨, 존 업다이크 그리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훨씬 더 격없는 문체로 글을 썼지만 여전히 각자의 방식대로 아름다운 문장가로 꼽힌다. 인간의 창의력은 무한하며, 글쓰기는 우리 모두에게 기쁨을 주는 핵심적인 기술이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걸맞게 언어를 가지고 놀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될 것이다.

나는 표준적인 문법과 특정 상황에 걸맞는 표현들은 언제나 존재할 것이라고 믿으며, 또한 문법과 이러한 각종 표현을 배우고 익힐 사람들 또한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다. 편집자로써 나는 놀라운 통찰력과 기분 좋은 문장들을 쓰지만 동시에 어휘, 문법, 그리고 그 밖에 글쓰기의 질을 향상시킬 다른 기술과 자원이 부족한 작가들을 종종 만난다. 내 직업은 이 작가들을 업계에서 인정받는 표준적인 수준까지 끌어 올리는 것이다.

Y세대(GenY)들이 앞으로도 스스로에 대한 정보를 지금만큼 계속 공개할까?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 근거없는 추측밖에는 할 수가 없지만, 내 생각에는 지금만큼 계속해서 정보를 공개할 것 같다. 사실인즉, 일단 지금처럼 많은 정보를 웹사이트에 올려 놓은 이상, 굳이 멈춘다고 얻는 게 뭔가? 기왕 시작한 바에야 끝을 보는 게 낫지. 사회적 규범은 개방성과 솔직함을 지금보다 더 받아들이도록 진화할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은 이혼 경력이 있음에도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았던가. 그리고 빌 클린턴은 마리화나 흡연 경험이 있음에도 당선됐고. 사회적 기대치는 변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기존) 제도권과 지금과는 다른 관계를 맺게 될까?

설문을 기획한 사람들은 이 질문의 폭이 너무 넓어서 대답하기가 어려우리라고 생각하고 포함시킨 질문인 것이 확실해 보이지만, 덕분에 답하기가 아주 즐거운 질문이 됐다. 폭넓은 정보와 사상의 공유는 분명 제도권과 대중 사이의 상대적 권력관계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변화가 서로 정반대의 두 가지 방향 어느 쪽으로든 일어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예측하는 첫 번째 시나리오에 따르면 제도권에 대한 소식을 고발/제보하는 것이 용이해지는 것이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개개인이 집결할 수 있는 능력과 결합해 기존 제도권 기관들이 좀 더 투명해지고 대중에게 좀 더 잘 호응하게 될 것이다. 그 반대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거대한 제도권 기관들은 고속 통신수단과 대규모 데이터 저장장치를 이용해 지금보다 더욱 더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룰 것이고, 감시를 통해 반대세력을 물리치레 될 것이다.

둘 중 어느 쪽이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전문가들은 계속해서 정부와 사업체들이 (정보를) 공개하고 공공으로부터의 조언을 받아들이라고 촉구하고 있고, 반면 제도권 기관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뭔지 알면서도 이를 거부하고 있다. 따라서 굳이 말하자면 이 영역에 있어서는 나도 비관적인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해야겠다.

온라인에서의 익명성이 지금처럼 유행할까?

예: 나는 사람들이 자기가 누군지 밝히지 않은 채로 집단의 일부가 되고 정보를 찾게 될 이유가 앞으로도 많을 것이라고 믿는다. 다행히 대부분의 시스템(예를 들어 미국 정부기관의 포험들)은 개인 사생활과 익명성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진화해나가고 있다. 마케팅 때문에 사업체들은 사용자의 온라인 상의 행동을 아이덴티티와 연결시키는 데에 더 열심인 편이지만, 어쩌면 마케팅 정보를 위해 가명을 하나 정도 유지하지만 그 가명이 실제 세상에서의 아이덴티티와 연결되지는 않는 형태의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불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정체가 드러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실감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미 이를 깨달은 사람들은 익명, 혹은 가명 뒤에 숨는 것을 시작할 수 있다. 국가로부터의 억압에 대해 말하자면, 불법을 저지르는 자와 이 자들을 밝혀내고자 하는 제도권 사이의 전쟁은 점차 확전 양상에 있다. 지금까지는 익명성의 가치를 높이 사는 사람들의 노력 덕분에 익명성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 하다.

시맨틱 웹이 정말 변화를 가져올까?

각종 기관과 뉴스 사이트들은 점점 더 많은 정보를 온라인에 공개함에 따라 이 정보를 정리하고 상호연결하는 것의 가치를 배워나가는 중이다. 나는 시맨틱 웹이 자그마하게나마 이미 사이트 한 개 한 개마다 퍼져나가고 있는 중이라고 본다. 의학 사이트에서 의학 용어에 따른 좀 더 자세한 분류, Drupal 기반의 블로그에서의 분류 시스템 등등.

하지만 팀 버너쓰-리는 개별 사이트에서 정보 검색을 좀 더 향상시키는 정도보다는 훨씬 더 원대한 시맨틱 웹의 비젼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그의 야망은 전 세계의 컨텐츠 프로바이더와 웹 디자이너들이 협력해서 서로 다른 사이트간의 네비게이션을 더 쉽게 만드는 것이다 - 원작자, 스타일, 관점이 서로 다를지라도.

인공지능이 10년 전보다는 조금 더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원대한 비젼도 언젠가는 현실이 될지도 모르지만, 현재와 미래 사이의 틈은 엄청나게 크다. 이 거대한 비젼을 실제로 이룩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같은 (최소한 서로 겹치는) 개념 정의(ontology)를 사용해야 할 뿐 아니라 각 개념을 확장하고 변형하는 방법 또한 표준화해야 한다. 물갈퀴 달린 발(webbed feet)가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각종 툴들이 지금보다 똑똑해져서 우리를 도와줄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지금보다는 엄청나게 더 똑똑해져야 할테다.

툴과 프로토콜이 다 완성된다고 하더라도, 수십억개의 웹페이지 전체가 이 프로젝트에 동참하도록 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클라우드가 도움이 될 수는 있다. 구글이 통계분석을 통해서 내 사이트와 연관된 링크를 생성할 수 있다면, 내가 손으로 할 필요는 없잖은가. 하지만 내가 직접 하는 것만큼 결과물이 좋지는 않다는 데 내기 걸 수 있다.

이 다음에 뜰 기술이 이미 빤히 보이는가?

예. 향후 5년간 기업들이 상업화해 널리 퍼뜨릴 기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 다른 이견이 없으리라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다음의 기술들을 지목하고 있다: 더 강력한 모바일 기기, 더 싼 넷북, 가상화와 클라우드 컴퓨팅, 소셜 네트워킹과 그룹 협업을 위한 명성(reputation) 시스템, 특정 정보를 보고하는 센서와 기타 소규모 시스템들, DIY 임베디드 시스템, 로봇, 자료터리와 통계적 분석을 위한 고급 알고리즘, 그 분석 결과를 나타낼 시각화 기술(visualisation), 감성기반 인공지능(affective technologies), 개인화/위치기반 서비스, 정확한 얼굴/목소리 인식기능, 전자종이, 변칙(anomaly) 기반 보안 모니터링, 자기 치유(self-healing) 시스템… 이 정도면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목록이다.

5년 이후로 보자면,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훌륭한 시각 프로그래밍 언어(visual programming langauge), 혹은 최소한 비슷한 면으로 지금 우리가 쓰는 것보다 좀 더 인간적인 언어를 꼽을 수 있다. 쉽게 배울 수 있는 고급(high-level) 프로그램 언어는 생산성을 엄청나게 향상시키고 에러와 보안 위험을 줄일 뿐더러 더 많은 사람이 더 나은 인터넷을 만드는 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은 여전히 end-to-end 원칙에 의해 운영될까?

[역자주: end-to-end principle은 인터넷 통신을 위한 프로토콜은 가능하면 통신 시스템의 양쪽 끝 지점을 기준으로 정의되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앞으로 성공할 기술에 대해 쓴 이 앞 질문에 대한 답에서부터 시작하겠다. 현재 end-to-end 원칙은 인터넷에 핵심적인 요소이다. 현재의 인터넷 프로토콜을 손보고 싶은 사람은 한둘이 아니겠지만, 정확히 뭘 고쳐야되는지에 대해서는 서로간에 동의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가까운 시일 내에 하향식으로(top-to-bottom) 인터넷을 다시 설계하는 일은 없으리라고 본다. 게다가 지금 프로토콜로 운영되는 수백만개의 시스템이 지닌 관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당분간은 end-to-end 원칙이 지켜질 것이라고 본다.

휴대폰 회사와 ISP들이 장벽을 치겠지만, 현대 통신 기술의 장에서는 외부로부터의 입력을 막으려는 자는 누구든 금새 지난 이야기가 되고 만다. 따라서 정부와 같은 중앙 제도권 기관들이 협력해서 압력을 가하지 않는 한, 현재 존재하는 시스템들의 관성이 혁신의 가속도와 새로운 서비스를 요구하는 대중의 욕구와 맞물려서 이런 애로사항이 심각한 문제로 비화하는 것을 막게 될 것이다.